태양은 영원하지 않다, 히가시노 게이고 <백야행(白夜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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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리하라 료지와 니시모토 유키호는 그 시작부터 범상치 않은 존재였다.
책을 끝까지 읽고 나면 그들의 어린시절 묘사가 절절하게 이해가 가지만, 등장부터 다크소서러 그 자체였던 소년 료지와
성인 못지않은 판단력과 계략들을 철저하게 숨기고 살아가는 구미호같은 소녀 니시모토 유키호. 그들의 묘사 자체가 어쩌면 복선이었는지 모른다. 돌이켜보면 어두웠던 소년 료지의 분위기는 자신의 손으로 아버지를 죽였다는 사실을 뼈에 새기고 속죄의 삶을 살아가기로 한 다짐을 나타내는 것 같고, 성숙하고 어른 여자같은 매력을 풍겼다는 묘사가 자주 등장하는 유키호는 어린 그녀가 성적으로 당했던 사건으로 인해 풍기는 분위기를 나타낸 표현이 아니었나 싶다.
기리하라 요스케의 시체가 발견된 것을 시작으로 그 끝은 시노즈카 제약의 해킹 사건이지만 그 시작과 끝 사이 무수한 범죄의 연결고리를 쥐고 있던 료지와 유키호는 그 누구도 책임을 지지 않았다. 요스케의 살인시건을 시작으로 공소시효가 끝나는 15년이 흘러가고 그 연결고리를 집요하게 따라가던 형사 사사가키 준죠는 마침내 기리하라 료지를 잡으려는 순간 영영 놓쳐버리게 된다. 새하얀 눈이 오던 날, 2층에서 몸을 던진 료지가 죽어버리면서 장장 반 뼘 두께의 책을 빼곡하게 채운 그의 범죄행적은 영원히 책임을 물을 수 없게 된 것이다. 한 술 더 떠서 공범임이 분명한 유키호는 준죠 형사가 보는 앞에서 료지의 시체를 빤히 보고는 처음 보는 사람이라며 지나쳐버린다. 누군가 이 책을 다 읽고 이 블로그까지 흘러들어왔다면 분명 마지막 부분을 읽고 '???' 의 기분으로 인터넷 창을 켰을 것이 분명하다. 그만큼 이 책은 독자에게 목끝까지 차오른 밤고구마같은 책이 아닐 수 없다 ㅎㅎ
다만 눈치가 빠른 사람이라면 절반을 읽어 갈 때쯤 촉이라는 것이 생기기 시작한다. 뭔가 냄새가 난다.
처음의 그 사건부터 이 둘이 직접적으로 연관되어 있다, 그리고 이제까지 책에 나타났던 '사건이란 사건은 모두'그들의 소행이라는 냄새 말이다. 초반부터 해결되기는 커녕 범인을 알 수 없는 사건이 발생하고 또 발생하기에 슬슬 머리가 복잡해질 때 즈음 그 냄새가 솔솔 나기 시작하고, 냄새를 따라가다 보면 어느새 장장20년 이야기의 끝에 도달해 있다.
둘이 직접적으로 관련되어 있다는 증거는 그리 많지 않지만, 세이카 여중에 다니던 유키호가 RK라는 이니셜의 파우치를 만들었고 똑같은 물건이 료지의 책상에 있었다는 묘사가 있기에 그 둘이 모종의 관계가 있음을 암시하기도 했다.
이미 학생일 때부터 옳지 못한 돈을 만져왔던 료지는 성인이 된 후 본격적으로 검은 돈을 쓸어모으기에 나서지만 그가 사는 아파트는 언제나 낡고 오래된 그곳이고, 종래에는 노리코의 집에 얹혀 살기까지 한다. 반면 어머니의 죽음을 계기로 양어머니의 손에 자라며 고급 사립중고교를 거쳐 대학까지 번듯하게 졸업한 유키호는 출처를 알 수 없는 시드머니로 주식을 하고, 자산을 차곡차곡 불려나가며 부동산 시세차익을 얻거나 놀라운 기세로 사업을 확장해 나간다.
"내 위에 태양 같은 건 없었어. 언제나 밤. 하지만 어둡진 않았어. 태양을 대신하는 것이 있었으니까. 태양만큼 밝지
는 않지만 내게는 충분했지. 나는 그 빛으로 인해 밤을 낮이라 생각하고 살 수 있었어. 알겠어? 내게는 처음부터 태양 같은 건 없었어. 그러니까 잃을 공포도 없지.' 유키호는 나츠미에게 이렇게 말한다.
태양은 어디서 에너지를 가져와 빛을 내지 않는다. 다만 스스로를 태워 빛을 유지할 뿐이며 언젠가는 사그라든다.
자기 자신을 끊임없이 태워 가며 미자막까지 유키호를 위한 빛이 되어준 료지를 백야를 비추는 태양보다 더 잘 표현하는 것이 있을까. 그리고 그 희생이 사랑보다는 속죄에 가깝다고 나는 느꼈다. 위험한 줄도 모른 채 자라 위험에 스스로를 던져가며 유키호를 위해 살아온 료지는, 평생 환풍구 속을 떠도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유키호를 범하던 아버지를 찌르고 건물 밖으로 나가기 위해 환풍구를 탄 순간부터 그의 인생은 끝없이 어둡고 불편한 배기구 속이었던 것이다. 그녀의 인생을 빼앗은 자신의 아버지를 대신해 죽는 그날까지 환풍구에 숨어서 그녀를 위해 살아온 속죄의 삶. 그러면서 마음에 유키호를 품었는지도 모른다. 그 누구와도 진심으로 이성관계를 가지지 않았다. 하지만 표현은 커녕 사랑의 대상에 그녀를 놓는 것조차 죄스러웠던 모양이다. 료지는 그렇게 속죄와, 사랑인지 극단적인 보호본능인지 모를 감정을 안고 거리에 몸을 던져 죽었다. 죽음조차도 그녀를 형사로부터 보호하기 위한 일이기에 망설이지 않고 선택했던 것이겠지.
누가 옳고 그르다고 말할 수 없는 것 같은 그런 소설이다.
물론 범죄는 나쁜 일이다. 그것이 성폭행을 사주하여 일으킨 정서적인 살인이거나 직접적인 살인이라면 더더욱.
료지와 유키호 둘이 용서받을 수 없는 인간들임에는 분명하지만서도 그 뿌리에는 인격을 난도질당한 두 어린이가 있다.
특히 책을 읽으며 유키호의 행동에 대한 묘사를 보면 볼수록 이 아이는 소시오패스인가, 하고 생각했다.
이런 성격장애는 유전적 요인이 만드는지 환경적 요인이 만드는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다고 하지만, 어떠한 기질을 가지고 태어났는데 어린시절의 어떠한 사건이 큰 영향을 미친 경우 흔히 사이코패스나 소시오패스라고 불리는 반사회적 성격장애를 가지게 된다고 한다. 유키호를 몇천에 팔아넘기고자 한 그녀의 친모, 후미요에게 돈을 쥐여 주고 그녀의 딸을 상습적으로 범한 요스케나 다다오 등 어린 유키호의 인격은 그들로 인해 몇 번이나 난도질당했을 것이라고 생각하면 유키호에게서 느껴지는 화려하지만 무미건조한 어떤 아우라가 설명이 되는 것 같다. 중학교 라이벌을 순종시키기 위해, 오래 함께한 친구를 자신이 원한 남자로부터 영원히 떼어놓기 위해, 의붓딸을 길들이기 위해 성폭행을 사주하고 자신은 위로하거나 보듬어주는 역할을 맡았던 유키호는 '그것이 영혼을 빼앗는 가장 손쉬운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스스로는 이미 영혼을 빼앗긴 경험이 있기에- 그리고 이 수단이 그들에게 줄 상처를 이해할 따듯한 영혼따위는 없기에 이런 일을 그저 사람을 길들이는 효과적인 방법 정도로 여겼던 것이다. 료지도 마찬가지이다. 아버지의 몸을 몇 번이나가위로 찌른 어린 그가 자라며 이후에 저지른 범행을 생각하면, 그 어떤 것도 그의 첫 살인보다 무거운 죄가 아니었기에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일들을 저질렀나 싶다. 이미 씻을 수 없는 죄를 저지른 손을 가졌으니 말이다.
백야행(白夜行), 하얀 어둠속을 걷다 라는 표현은 그래서 작품 전체를 관통한다. 작품의 수많은 등장인물은 결국 백야의 두 사람, 료지와 유키호와 어떻게든 얽혀 있는 인물이고 그 얽힘은 결코 긍정적이지 않다. 결말이 시원하지도 않다.
하지만 료지가 살아 잡혔더라면, 그래서 유키호와 료지가 응당 벌을 받았더라면 우리의 속이 시원했을까? 문절망둥어와 대포새우의 정체가 드러나 권선징악의 선상에 놓이게 되는 한편, 이 일의 시작이 되는 끔찍한 일을 저질렀음에도 죽어버렸다는 이유로 그 죄를 두고두고 갚지 못하고 묻혀버린 어른들 때문에 더욱 분노가 치솟지 않았을까.